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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온라인 추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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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온라인 추모관 조회
순천출신 독립운동가 김계수옹 (여순사건 피해자이심) 추모합니다
작성자주용석 작성일2022-08-19 조회수700
작성자주용석
작성일2022-08-19
조회수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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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
3.1운동시 많은 교직자와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교직자 스코필드, 약국의 이갑성, 남대문 교회 함태영 목사 등이 유명하고, 학생으로서는 이용설, 김문진 등이 유명하다. 독립신문이 방사선과 암실에서 인쇄되었는데, 이의 전국적 배포도 세브란스 학생들이 맡았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박주봉(함북), 유명호(함남), 김하헌, 김기반(평북), 이용설(평남), 배순협(황해), 변기백(강원), 김문진(경북), 김성국(경남), 이순철(마산), 김계수(전남), 김병수(전북)
70  延世醫史學 제9권 제1호
이들은 독립운동 참여로 인한 퇴학과 옥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간호사들은 거리 부상자 치료가 잘 알려져 있다.

 

 

여순사건과 순천지역 좌.우익 세력의 동향(임송자) 189
이들보다 앞서 김희주 순천철도국장도 체포되었다. 당시 철도국 직원이었던 강길태 129)는 철도국이 반군에 의해 접수된 후 김희주 철도국장이 직원들을 한곳에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협조하라고 지시를 우회적으로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김희주의 지시는 자발적으로 반군에 협력하라는 것이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적절히 처신하여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으로 내린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130)
반군이 순천으로 진입해 들어왔던 20일과 드 다음날에 걸쳐 체포된 우익인사와 경찰관은 경찰서 유치장과 소방서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 중에서 정부군의 순천 탈환으로 읍장 김성초, 철도국장 김희주 등은 구출될 수 있었다.
총살당했다고 전해지던 순천군수 김영관도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131) 그런데 이미 경찰서장 양계원, 감찰서장 한운경, 동인병원장 김흥조, 협신양조장 사장 이동표, 순천철도병원장 김계수 등은 사살된 상태였다. 132)
양계원은 중앙극장앞에서, 한운경은 조흥은행 앞에서 김흥조. 이동표. 김계수는 경찰서에서 총살당했다. 이정렬 광복청년회장도 봉기군에 의해 중앙극장 앞에서 총살당했

 

 

 

 

 

없었다. 이리하여 대동청년단장을 역임한 순천 남국민학교 교사 金景鎬와 학련생 金致亨(순천사범 2년)은 군청 옆에 있는 청년단 합숙소로 피신하였다. 124)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은 광복청년회장 이정렬과 함께 광순여관으로 도피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얼마 안 되어 체포되었다. 순천감찰서장 한운경 감찰관도 체포되었고, 양계원 경찰서장도 변복을 하고 탈출하려다가 21일 오전 10시에 동외동에서 좌익학생에 의해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125)
지역유지들은 20일에 읍내에서 군.관.민 대책회의를 가질 예정이었다. 이들은 20일 아침에 총소리를 듣고도 흔히 있는 군경간의 사소한 마찰로 여기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다가 산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반군이 읍내 외곽을 포위한 뒤였다.
순천의 대표적인 지역유지를 꼽자면 김양수. 김정기. 金永璀. 金成初. 金興祚. 李東杓. 金桂洙등을 들 수 있다. 5.10선거에서 낙선했던 한민당 김양수와 미군정기 군수를 역임했던 김정기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좌익세력의 추격대상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군수였던 김영관은 순천중학 뒷산을 타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순천읍장 김성초, 동인병원 원장 김흥조, 협신양조장 여순사건과 순천지역 좌.우익 세력의 동향(임송자) 189
이들보다 앞서 김희주 순천철도국장도 체포되었다. 당시 철도국 직원이었던 강길태 129)는 철도국이 반군에 의해 접수된 후 김희주 철도국장이 직원들을 한곳에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협조하라고 지시를 우회적으로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김희주의 지시는 자발적으로 반군에 협력하라는 것이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적절히 처신하여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으로 내린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130)
반군이 순천으로 진입해 들어왔던 20일과 드 다음날에 걸쳐 체포된 우익인사와 경찰관은 경찰서 유치장과 소방서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 중에서 정부군의 순천 탈환으로 읍장 김성초, 철도국장 김희주 등은 구출될 수 있었다.
총살당했다고 전해지던 순천군수 김영관도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131) 그런데 이미 경찰서장 양계원, 감찰서장 한운경, 동인병원장 김흥조, 협신양조장 사장 이동표, 순천철도병원장 김계수 등은 사살된 상태였다. 132)
양계원은 중앙극장앞에서, 한운경은 조흥은행 앞에서 김흥조. 이동표. 김계수는 경찰서에서 총살당했다. 이정렬 광복청년회장도 봉기군에 의해 중앙극장 앞에서 총살당했다. 133) 25일에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순천에서 반군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300여 명에 달하였다. 134) 이러한 수치는 신뢰도가

 

 

사장 이동표, 순천철도병원장 김계수 등은 그대로 읍내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26) 이동표와 김계수는 한민당 순천지부 부지부장이기도 했다. 127)
김성초와 이동표는 공동으로 양조장을 차려 그 상호를 협신양조장이라 했는데, 사장은 이동표가 맡았다. 당시 협신양조장 소주 맛이 호남일대에 이름을 날려 속칭 동표소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흥조는 독촉국민회 순천지부장, 순천경찰서 자문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다. 읍내에 갇힌 김성초. 김흥조. 이동표. 김계수 등 4명은 어쩔 수 없이 동표양조장 2층 천정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표양조장에서 근무했던 좌익종업원이 봉기군 측에 정보를 제공하여 김성초를 제외하고 김흥조. 이동표. 김계수가 체포되었다. 이어서 바로 김성초도 검거되었다.
그는 동표양조장에 있다가 다른 피신처를 찾아나서 중앙동 처가의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가 잡히게 된 것이다. 128)
124) 金奭學. 林鐘明 앞의 책 99쪽

 

 

 

없었다. 이리하여 대동청년단장을 역임한 순천 남국민학교 교사 金景鎬와 학련생 金致亨(순천사범 2년)은 군청 옆에 있는 청년단 합숙소로 피신하였다. 124)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은 광복청년회장 이정렬과 함께 광순여관으로 도피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얼마 안 되어 체포되었다. 순천감찰서장 한운경 감찰관도 체포되었고, 양계원 경찰서장도 변복을 하고 탈출하려다가 21일 오전 10시에 동외동에서 좌익학생에 의해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125)
지역유지들은 20일에 읍내에서 군.관.민 대책회의를 가질 예정이었다. 이들은 20일 아침에 총소리를 듣고도 흔히 있는 군경간의 사소한 마찰로 여기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다가 산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반군이 읍내 외곽을 포위한 뒤였다.
순천의 대표적인 지역유지를 꼽자면 김양수. 김정기. 金永璀. 金成初. 金興祚. 李東杓. 金桂洙등을 들 수 있다. 5.10선거에서 낙선했던 한민당 김양수와 미군정기 군수를 역임했던 김정기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좌익세력의 추격대상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군수였던 김영관은 순천중학 뒷산을 타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순천읍장 김성초, 동인병원 원장 김흥조, 협신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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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최종 수정일 : /
2022-01-24